경북 | 짬낚! 그 즐거움 Ⅱ(토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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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윤기언 작성일14-06-24 10:06 조회16,668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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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6.22. 금일 기상청 일기예보중 동네예보를 보니 청통쪽 밤에 소나기 예보도 있고 바람도 좀 부는 듯 해서 갈등을 때리다가 길을 나섭니다. 최근 조황이 좋다는 청통 토봉지를 오랜만에 가봅니다.
아주 오래 전엔 수질도 괜찮았고 낚수여건이 무난했는데 상류 위쪽 마을에 축사도 생기고 오폐수가 유입되어 수질도 많이 탁하게 되었고 블루길도 유입되어 낚시하기 꺼려지는 못이라 잘가지 않았는데 최근 조황이 좋다길래 오랜만에 와보니 아직도 수질이 개선되지 않아 탁하다는 걸 육안으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생활하수나 축산 오폐수는 못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따로 하수도가 있는 것 같은데도 토봉지의 수질이 여전히 탁한 건 이해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토봉지에 도착하여 상류에서 제방을 보면서 담아 봅니다. 바람이 제법 붑니다.
제방우안이자 마을진입로 입니다. 군데군데 낚시자리와 주차공간이 있고 길따라 전선과 전화선이 있어 감전에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낚싯대를 들고 이동하는 건 삼가해야 합니다.
제방좌안 산쪽인데 동선이 멀지만 오후에 그늘도 지고 비교적 조용하게 낚시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제방좌안 최상류인데 예전엔 저 안쪽까지 차량진입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안되나 봅니다.
마을앞에 있어 오가는 차량출입으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상류에 집이 들어서서 상류포인트는 진입이 불가하고 길건너편 산쪽 포인트도 예전에 비해 동선이 멀어진 듯 합니다.
상류에 최근에 지은 집이 보입니다. 토봉지는 예전엔 어부마을앞에 있다고 어부지라고도 했는데 토봉지 상류지나 조기 보이는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면 어부마을이 나옵니다.
젊은 날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라 이 곳에만 오면 생각나는 이가 있으니 보고싶은 얼굴이 떠올라 추억에 잠기곤 했었습니다.
주말이면 M과 저는 대구에서 당시 35번 버스를 타고 금호시외버스정류장에 내려 사일못 상류까지 하염없는 길을 걸어가서 낚시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슴다. 지금 생각하면 걷기엔 제법 먼 길이였지만 당시엔 그 정도 거리의 길은 여사로 걸어 다녔습니다.
젊은 날의 시간은 더디게 간다는 말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오가는데 허비하는 시간이 많았음에도 우리의 낚시하는 시간은 충분했고 재미도 있었으며 조과도 훌륭했던 참좋은 시절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라꼬 시간 들고 돈 들여가며 그 먼 곳까지 갔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주변에 작은 소류지들도 참 많았는데......
당시에 생각으로는 큰 못에 가야 큰 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일 듯 합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으로 기억하는데 정국은 어수선하고 "본인은 29만원밖에 없다"는 이가 칼을 휘두러던 시절이라 서슬퍼런 군사정권에 꿈과 희망을 잃은 학생들이 많이 방황하였고, 저역시 휴교와 휴강이 많아서 낚시를 많이 다녔는데 그 때 동네후배인 M하고 낚시를 많이 다녔습니다.
그 당시 어느 주말 그날도 사일못 상류에서 낚시하다가 조황이 신통찮아 점심을 먹고 사일못위의 용산지로 갔더니 그기 역시 잘되질 않았습니다. 그 때도 더워서 땀흘린 기억이 있으니 거의 이맘 때쯤으로 배수로 낚시가 잘 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짐을 챙겨서 무작정 지금의 우천삼거리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니 토봉지 제방이 보여 우리 둘은 “바로 저기다!”를 동시에 외치며 더운 날씨에도 뛰다시피 토봉지상류로 올라 갔습니다.
멀리까지 걸어온 보상이라도 하듯이 토봉지는 낚시도 잘되고 당시 기준으로는 씨알도 준수했습니다. 손바닥만한 것이 쉴새없이 낚이는 와중에 어쩌다 손아귀에 꽉차는 넘이 나오면 우린 쾌재를 부르며 좋아라 했었지요. 이곳 토봉지에서 계속하고 싶었으나 막차에 맞춰서 금호시외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야 되는 부담감 때문에 우린 얼마후 점방을 걷고 용산지에서 좀 더 즐기다가 사일못을 휘돌아 터덜터덜 걸어 나와서는 금호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로 돌아 왔습니다.
젊은 날의 참으로 즐겁고 긴 하루였습니다.
대구로 오는 버스안에서 우린 토봉지에 자주 가자고 약속을 해놓고는 멀다는 이유로 그후 한번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군입대를 하면서 M과의 연락은 꾾겼습니다.
그 후 녀석을 만난 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제대후 졸업하여 직장을 잡고 장가가서 우리 애들이 태어나서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저는 대구에서 청도 직장까지 출퇴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퇴근 후 직원들과 회식을 하고 밤늦게 팔조령을 넘어 가창을 지나 수성못을 돌아서 신호대기하고 있는데 옆에 선 차의 차창이 열리는데 녀석이였슴다.
“어~! 니 M아이가?” “아이고~! 형님! ”
그 늦은 밤에(아마 자정이 지났을 듯) 우린 신호를 받아 건너가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다시 만난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더랬습니다.
M은 현재 칼잡이 따까리를 하는데 회뜨는 걸 배워서 횟집을 차리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엔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일반전화 연락처를 주고 받았는데 몇 달후 전화해 보니 녀석의 근무지가 바뀐 탓에 연락이 되질 않았습니다.
얼마후 청도근무를 마치고 대구로 들어와 대구공고 근방의 횟집에서 회식을 하고 계산을 하는데 주방장 차림의 녀석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어깨를 툭치며 “형님! 오랜만입니다.” 하길래 돌아보니 M이였습니다.
녀석은 회식중에 화장실 다녀오던 저를 보았고 일행인 직원들이 많아 아는 체하기 거시기했다고 했습니다.
M의 횟집에 몇 번 가서 그 동안의 얘기도 나누고 그랬는데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어 어느 날 회집에 가보니 횟집은 이미 없어져 버렸고 M의 행방을 알 길이 없게 되었네요.
우리 가족이 녀석의 횟집에서 저녁을 먹은 지 10년은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당시 초딩이였던 우리 아들이 벌써 꺽어진 쉰이니......
“아직은 주방장 보조라서 나중에 주방장되면 많이 챙겨 드리겠심더.” 하면서 해삼, 멍게와 개불을 슬며시 놓고 가던 녀석의 풀죽은 미소가 떠오르네요.
어느 날 어떤 곳에서 M을 또 우연히 만나게 될런지?
보고 싶네요.
다음 상면은 낚시터에서 만났음 하는데 M도 낚수를 즐기는 지 궁금합니다.
철개이 한마리가 마른 갈대위에 앉아 있길래 담았는데 역시나 줌이 안되니 잘 안 보이는데 바람에 풀잎까지 살짝 가리네요.
어둠이 내리고 입질은 없고 낚시꾼들은 많이 포진해 있으나 배수를 하는 지 붕어의 입질은 없고 블루길만 간간히 걸려 나옵니다. 그러다 보니 상념은 깊어지고 옛추억에 잠겨서 비몽사몽입니다. 상류쪽엔 보트 한대가 떠서 자세히 보니까 대형 스치로폼으로 만든 배여서 허술해 보였지만 낚시하는데는 지장없나 봅니다.
상념의 끝자락을 부여쥐고 졸고 있다가 좌측 2.2대의 솟구치는 찌오름에 화들짝 놀라 챔질하니 블루길이 메~롱합니다.
오늘도 모델섭외는 실패했습니다. 강낚시나 가야했는데 쩌ㅃ~
열매가 익으면 예쁜 노박덩굴로 보입니다.
처음엔 방동사니나 왕골인 줄 알았는데 같은 사초과인 매자기로 추정합니다. 사초과는 대체로 줄기가 세모입니다.
비름인데 개비름인 듯 하네요. 잎끝이 오목하게 들어가야 참비름이라는데 뾰족하니 개비름이겠지요. 물론, 개비름도 나물로 먹습니다.
마름입니다. 물이 많이 탁해 보입니다. 마름은 말밤이라고도 하고 영어로는 WATER NUT이라는데 밤맛이 나죠.
22시가 가까워 지니 초저녁 구름사이로 보이던 별들도 보이지 않고 멀리서 천둥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번씩 번쩍이는 섬광이 밤하늘을 밝혀 역시 예보대로 소나기가 오나보다고 생각하며 22시 30분에 점방을 걷고 보따리를 싸는데 빗방울이 긋기 시작합니다.
당초엔 0시까지 즐기다가 갈려 했는데 날씨가 궂어 22시 50분에 철수합니다.
23시경에 와촌휴게소앞을 지나는데 빗방울은 굵어지고 천둥번개가 잦네요.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이준호님의 댓글
이준호 작성일분위기 멋집니다. ㅎㅎ
윤기언님의 댓글
윤기언 작성일댓글 감사합니다. 즐낚하세요.
김정수님의 댓글
김정수 작성일
분위기 좋습니다...
이가뭄에도 배수가 마니 안된곳이군요...
화보를보니 물가 나가고싶어집니다 ㅠㅠ
내일이면 낮낚시 출조가 가능하지만요 ㅎㅎ
이젠 모기와의 전쟁인 시기입니다...안전출조 즐거운 출조길되셔욤
잘보고갑니다
윤기언님의 댓글
윤기언 작성일감사합니다. 즐거운 조행되시기 바랍니다.